높은 겨울 하늘 아래의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 두 남녀 마주보며 서 있다. 주차장에는 늘어서 있는 차들 있고, 그 가운데 뒷자리 문이 열린 빨간 스포츠카 하나. 남녀는 그 차 헤드라이트 앞에서 대화한다. 이미 한 차례 폭풍 같은 대화가 지나간 듯, 둘 다 분위기 심상찮다.
남자, 류세이 흐느끼듯 말한다. 잘 잠가 두었다고 생각한 감정이 방울방울 새는 중이다. 하지만 울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카나에의 손과 팔목 사이를 가볍게 잡고 있다. 와중에 그녀가 아플까 싶어 습관처럼 배어나오는 배려, 팔을 잡아 당기지도 못하고 그저 늘어뜨린 팔에 닿았다는 것에 가까울 뿐이다.
류세이: 나 너 없으면 안 돼. 네가 나한테 뭐라고 말해도 나는 너 아니면 싫어.
여자, 카나에 침묵한다. 이건 아니다. 당신을 떠나온 건 당신이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당신은 본래부터 내가 아니어도 괜찮았던 사람이다. 따지자면 나는 악역이며, 당신을 괜히 뒤흔들어 혼란에 빠뜨린 악마다. 내게는 태초부터 허락된 마음이라는 것이 없다. 사랑받지 않기 위해, 모두에게 미움받기 위해 태어났다. 하지만 당신은 다르다. 당신에게는 당신을 봐줄 사람이 필요하다. 더 이상은 상처 받아선 안 된다. 친부모라 믿어 왔던 양부모에게, 노력했던 시간에게, 사랑했던 여자에게 외면받고, 결국엔 기댈 구석 없어 싫어하면서도 쳐다보게 된 폭력적인 친아버지에게까지 외면당한 당신은 나에게까지 상처 받아선 안 된다.
카나에: (웃는다. 가식적 미소다. 몸에 배어 있는, 한때 이 남자가 죽도록 싫어한 자신의 가식을 드러낸다.) 저 같은 사람한테 신경 끄시고 이만 가세요. 그렇게 심한 말 들어놓고도 절 더 붙잡고 싶으신가요? (비웃듯 고개를 든다) 취향이 저 같은 사람이면 뭐, 저 말고도 많아요. 그 중에 하나 골라 잡으시는 건 어때요? 제가 그쪽이라면 진즉에 그랬을 텐데.
류세이: (다급하게) '너 같은' 사람으로는 안 돼. '너'여야 돼!
카나에: (여전히 웃는 얼굴이다. 상처 주기 싫지만, 이러지 않으면 가지 않을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상처 주기로 결심한다.) 저는 아니에요. 오히려 최악이죠. 차라리 류타로 님께 돌아가는 게 낫겠어요. (미소를 유지한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약간 울컥한 듯한 표정. 자기도 모르게 진심이 드러났다.) 그건 그렇고 참 웃기네요. 류세이 님은... (약간의 분노를 삼키며) 저를 싫어하시지 않았나요?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뭔지 참 궁금하네요.
손목이 아프다는 듯 팔을 움직이는 카나에. 놀란 듯 류세이가 손을 놓자, 그대로 뒤 돌아 열려 있던 차 문을 잡는다. 차에 다시 탈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소리와 기시감에 돌아보면, 찬 바닥에 무릎 꿇은 류세이가 있다. 그대로 두 사람 다 잠시 멈춰 있다. 침묵이 감돈다.
류세이: (숨 들이마신 뒤, 천천히.) ...너를 싫어하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 걸까. 너는 왜 항상 상처만 받으면서 살까. 넌 어떻게 상처 받으면서도 그걸 태연히 얘기할 수 있는 걸까.
카나에: ...
류세이: 전부 돌려받을게. 너한테 상처줬던 만큼 나도 상처 받고 싶어. 항상 상처 받아 왔던 너한테, 이제 내가 다른 무언가가 되어 주고 싶어.
카나에, 아무 말 할 수 없다. 류세이가 떨고 있다. 자신이 너무도 한심하다는 듯이. 이건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다. 안 그래도 잔뜩 상처 받는 사람이 자신 때문에 더 상처 받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려고 당신을 떠난 게 아니다. 게다가 당신은 잘못 알고 있다. 나는 그냥 상처를 주기만 했던 사람이다. 오해라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왠지 그렇게 말할 수도 없다.
그런 와중 류세이, 카나에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생각한다. 참 의미 없이도 싫어했었다. 하지만 당신을 싫어한 시간들은 전부 나를 혐오한 시간들이었을 뿐이다. 나는 착한 척하며 사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당신의 위선보다야 나은 삶을 산다고 여겼다. 그러나 당신의 눈에 보이는 위선과 나의 보이지 않는 혐오는 다르지 않았다. 죄질을 따지자면 내가 더 나쁜지도 모른다. ...아니다, 확실히 내가 더 나쁘다. 당신은 연약하니까.
류세이: 너, 싫어할 사람 필요하지 않아? (고개 든다. 나를 보지 않는 카나에를 올려다본다. 당신이 나를 보지 않아도 된다. 내가 쳐다보고, 내가 붙잡으면 된다.) 넌 항상 상처만 받잖아. 그러니까 상처 줄 사람도 필요할 거야.
웃어버리는 류세이. 바닥에 손을 짚고 무릎을 끌어 카나에 앞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고 생각한다, 안타까워한다. 당신은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만 생각하며 산다. 하지만 당신이 주는 상처는 언제나 궁극적으론 자신을 향한 것이었고, 받는 사람들에겐 머물지 못한다. 내밀었던 모든 상처는 오롯이 카나에, 당신의 몫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것이 싫다. 당신이 더 이상 상처 받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당신이 주는 상처를 온전히 삼켜낼 사람이다. 당신에게는 이제 부메랑이 필요하지 않다. 업보 같은 건 당신과 가장 먼 단어가 될 것이다.
류세이: 그거 나로 해. 네가 평생 원망하고 싫어하고 상처 줄 사람 나로 하자.
(차마 잡지는 못하고 카나에 손에 가까이 닿을 정도로만 두 손을 올린다.) 나를 죽여버리고 싶어 해도 좋아. 다른 사람 만나서 날 비웃어도 좋아. 날 가지고 놀아. 뒤흔들고 지치게 해줘. 버렸다가 주웠다가 손 내밀었다가 걷어차여도 난 행복해. (심호흡한다. 이렇게 말하면 질릴 것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말을 멈출 수가 없다.) 너 스스로 멈출 수 없는 거라면 다른 곳에서 상처 받아도 어쩔 수 없겠지. 넌 아버지도 중요하고 류타로도 사랑하잖아. ...그럼 대신 만신창이가 돼서라도 나한테 찾아와. 찾아와서 때리고 상처 줘.
웃음이 가시지도 않았는데 울음이 터진다. 이상한 꼴이 된 표정. 류세이, 고개 숙이고 땅 본다. 아, 생각보다 훨씬 비참하다. 여전히 두 손은 올린 채로, 이제는 기도하듯 서로 맞잡고 있다.
류세이: 제발 나로 해... 너 때문에 죽을 만큼 힘들고 싶어...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어... ... .
두 사람의 침묵이 이어진다. 카나에, 천천히 류세이 돌아본다. 이 미련한 사람을, 상처 주기 싫어서 떠나 왔더니 오히려 상처 받게 해달라는 사람을, 어쩌면 좋을까. 난데없이 바람이 차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고 보니 재회의 날도 이렇게 추웠더랬다. 그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지만, 어쩌면 그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지난다.
카나에, 다른 대답보다 우선 류세이의 손을 잡기로 한다. 왠지 자신도 울음이 나올 것만 같다. 아니, 이미 맺혀 있다는 걸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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